오답 노트를 만들다 그만두는 까닭은 대개 하나다. 문제를 통째로 옮겨 적기 때문이다. 한 회분에서 스무 문항을 틀렸다면 옮겨 적는 데만 한 시간이 든다. 그러고 나면 정작 다시 볼 힘이 남지 않는다.
남길 것은 문제가 아니라 판단이다
같은 문제가 그대로 다시 나오지는 않는다. 다시 나오는 것은 내가 잘못 판단한 방식이다. 그래서 적을 것은 세 가지면 된다.
- 무엇을 골랐나 — 내가 고른 번호와 그 선지의 핵심 한 마디
- 왜 골랐나 — 그때 무엇을 근거로 삼았는지
- 어디서 갈렸나 — 정답과 갈리는 한 지점
세 줄이면 끝난다. 문제 번호와 회차만 옆에 적어 두면 나중에 원문을 다시 찾을 수 있다.
예를 들면 이렇다
3회 42번 · 로마자 표기
골랐다: ③ 굳히다 — guthida
왜: 받침을 그대로 옮기면 된다고 생각했다
갈림: 구개음화는 표기에 반영한다. 소리 변화 가운데 된소리되기만 반영하지 않는다
다음에 로마자 문항을 만나면 이 한 줄이 먼저 떠오른다. 문제를 옮겨 적었다면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.
영역마다 적을 것이 다르다
어휘
낱말의 뜻만 적으면 다음에도 틀린다. 어떤 상황에 쓰는 말인지를 함께 적자. '대기만성 —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/ 오래 준비해 뒤늦게 잘된 경우에 쓴다. 무너진 경우에는 못 쓴다.'
어법
규정 한 줄을 적는다. 낱말 하나가 아니라 그 낱말이 속한 규칙을 적어야 다음에 쓰인다. '가만이 → 가만히 / -하다가 붙으면 -히'
읽기
적을 것은 딱 하나다. 근거가 본문 어디에 있었는가. 몇 문단 몇 번째 문장인지까지 적어 두면, 다음에 지문을 읽을 때 어디를 표시해야 하는지가 몸에 붙는다.
듣기
무엇을 놓쳤는지 적는다. 숫자를 놓쳤는지, 마지막 발화를 놓쳤는지, 아니면 '전부'와 '일부'를 구별하지 못했는지. 놓친 자리가 몇 번 겹치면 그것이 내 약점이다.
다시 보는 시점
적어 두고 한 번도 다시 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. 두 번만 보자.
- 다음 회분을 풀기 직전 — 5분이면 훑는다. 같은 함정에 두 번 빠지는 것을 막는다.
- 시험 이틀 전 — 이때는 새 문제를 풀 때가 아니라 내가 틀린 방식을 되짚을 때다.
같은 줄이 세 번 나오면
노트를 넘기다 보면 비슷한 줄이 몇 번씩 나온다. '근거를 끝까지 안 읽고 골랐다', '반대 방향인 줄 모르고 골랐다' 같은 것이다. 그 줄이 세 번 나오면 그것은 문항의 문제가 아니라 내 습관이다. 노트 맨 앞에 큰 글씨로 적어 두자. 그 한 줄이 다음 회분에서 서너 문항을 살린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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